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프 브로즈 티토 (문단 편집)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건국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static.tvtropes.org/Tito_5836.png|width=100%]]}}}|| 해방 이후 티토는 연합군 측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유고 과도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한다.[* 본래 영국에 망명해 있던 페타르 2세는 이때 귀국하여 다시 집권하려 하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독일을 최대치로 자극해 국민들을 나치의 학살로 고통받게 해두고 혼자 도망간 페타르 2세를 국민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연합국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결국 페타르 2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약속을 깨고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갈등을 빚어 같은 해에 [[티토-스탈린 결별|코민포름에서 영구제명되고]],[* 이 직전에 [[베를린 봉쇄]]가 있었다. 때문에 베를린 봉쇄는 미국의 물량 때문에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유고의 코민포름 제명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려는 스탈린의 계책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비동맹주의 외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냉전 당시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를 넘나드며 어느 국가와도 극단적으로 척을 지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로 고립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를 반전시켰다. 그 일례로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서방 진영의 [[장폴 사르트르]]까지도 남한이 북침했다는 소련과 북한의 발표를 지지했는데도 유고슬라비아만 혼자서 남침설을 고수했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달리 소련의 참전 요구에도 이를 거절하였다.([[6.25 전쟁/전쟁 발발#s-3|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 3. 용어 문단 하단 참고]])[* 중공군이 개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헝가리 인민공화국]], [[폴란드 인민공화국]], [[동독|독일민주공화국]], [[몽골 인민공화국]] 등 공산권 국가들도 6.25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는 [[1.4 후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북한은 오랜 기간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해 왔다.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찌또도당''', '''현대수정주의자'''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극도로 강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티토의 [[제3세계]] [[비동맹운동]](북한식 표현으로는 '쁠럭불가담운동')에도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1960년대 중반에는 <조선중앙년감>에 유고슬라비아가 6.25 전쟁 당시 북한을 비방하고 미제를 변호했다며 징징거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제와 손을 잡았다느니, 무역 자유화를 하여 경제가 파탄났다느니 하면서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오죽하면 1960년대 말이 되면 <조선중앙년감>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김일성 교시까지 들먹이며 깠으며, 급기야 1969, 1970년판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 중립국은 물론 프랑스 뒤에 놓으면서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 제25차 유엔총회에서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이 발의한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해체안에 찬성하며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양국이 외교 관계 복원에 합의하면서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동맹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티토와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며, 1975년 김일성이 유고슬라비아에 방문하여 티토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매우 가까운 관계로 바뀌었다. 이 때부터 북한은 티토를 '''찌또동지'''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미국과 군사원조조약을 체결해 [[M47 패튼]], [[F-86]] 등 미국제 장비를 대량으로 공여받았다. 또한 과거의 역사 내내 민족, 종교, 언어의 갈등 때문에 툭하면 내부에서 서로 싸우던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을 감안해서 형제애와 일치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펼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등의 유고 내부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제거하였으며, 각 구성 공화국내의 거주민들이 타 구성 공화국내에도 거주해서 살아가도록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과를 이룩하였고, 이렇게 민족이 혼합된 상태를 가칭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고 설정하여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서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써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의 구상이 일부분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과도 있었으며, 티토 사후 지속적으로 각국의 이해를 조율할 정치가가 있었다면 진짜로 그런 가능성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후 티토가 죽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터진 다음에 이 지역 국가 사람들은 '티토 시절이 좋았다' 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실제로 티토 시절엔 여러 민족들이 제법 화합을 이루며 잘 살았다는 증언이 많다. 한편으로 스탈린주의 및 소련과의 차별화를 위해 탈권위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1952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기득권화를 방지하기 위해 집권정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정치조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했다. 아울러 공장, 공기업의 경영권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는 "[[노동자 자주 관리]]" 체제를 도입, 실시하여 사적 소유의 철폐와 낮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비효율과 국가의 과도한 권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덕분에 물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기는 했으나 동시기 타 공산국가와는 다르게 임금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이 상당해서 이 문제로 골치 좀 썩혔다고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비판으로 흔히 드는 사례이다. 한편 90년대 초반 여러 공산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하게 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작용을 겪게 되었는데, 이 경우 당관료들이 국영 기업을 불하받으면서 독과점이 일어나 발생한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와는 원인이 다르다.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체 게바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쿠바의 산업정책에 적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민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과 [[보이보디나]]의 헝가리인 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했으며, 전통적으로 발칸 지역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홀대를 받았던 [[집시]]들에게도 유고슬라비아의 시민권을 부여하며 자국민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덕분에 구 유고 연방이 내전으로 해체된 현재에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 등 예전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국가의 집시들은 티토를 구유고권 국가들의 남슬라브족 계열 현지인 못지 않게 추앙하거나 티토의 집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집시]] 문서 참조.] 이런 행보를 보면 정적에 대한 탄압만 빼면, 당시로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의 개방 정책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을 때 적극적으로 참고했던 나라가 기업별 독립채산제를 유지하던 [[헝가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의 [[유고슬라비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그렇다고 [[공산주의]]의 핵심인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는 노동자자주관리 제도를 통해 소련보다 훨씬 강하게 인정했다. [[경제민주화]] 문서 참고.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티토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티토는 유럽의 [[68혁명]] 당시 기존 정치체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국가 지도자이기도 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도 지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아니었다.] 이 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 요구에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의 간섭에 위기를 느끼던 티토의 입장에서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에 격렬히 반대하던 19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68운동 내에서 기존의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나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종신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신사적인 대접을 했다. 1950년대 이래, 당내에서 티토의 반대파들이 추방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처형이나 투옥이 아니라 그저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야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티토의 과거 부하이자 최대의 정적인 밀로반 질라스(Милован Ђилас / Milovan Đilas, 1911년 6월 12일 ~ 1995년 4월 20일)는 티토가 나치 독일과 뒷거래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터트려 파르티잔 투쟁을 정통성으로 삼는 티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그래도 처형은 당하지 않았다. 질라스는 티토 사후 1990년대 초까지 살아있다가 1995년에 사망했다.] 또한 민족주의자나 민주화 인사, 친소파를 탄압하고 [[https://en.wikipedia.org/wiki/Goli_Otok|골리 오토크]] 수용소에서 이들을 분리 수감한 바는 있다. 거기에 인민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UDBA라는 비밀경찰을 조직해서 억압적 통치를 하기도 했다.[* 골리 오토크 수용소는 티토가 사망한 직후인 1980년대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다가 1989년에 폐쇄되었다.] 다만 티토가 사망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된 후에 유고 전쟁이 벌어지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프라뇨 투지만]],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같이 민족주의 노선을 내세운 각 구유고권 국가들 내 지도자들이 [[제노사이드]]와 전쟁을 선동, 조장하는 강경책을 서슴없이 행한터라 티토의 과오는 상대적으로 묻히게 됐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atlanticsentinel.com/Josip-Broz-Tito1.jpg|width=100%]]}}}|| || 1954년의 티토. [[유서프 카쉬]]가 촬영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